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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토리텔링

인셉션, 당신이 마지막 순간에 놓친 것

by 까칠한 조작가 201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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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토템은 꿈과 현실을 판정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코브의 경우 그의 토템인 팽이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돈다면 꿈이고 쓰러지면 현실이라는 식이다.
엔딩장면에서 팽이는 쓰러질듯 말듯 휘청거리는 도중에 영화가 끝나버린다.


꿈에서 깬 건 확실한 것 같은데 토템은 왜 안 쓰러지는 거야?
 대체 뭘 더 숨겨놓은 거지? 내가 뭘 놓친 건가? 현실인가, 아님 이것도 꿈속의 꿈?”


이런 식의 의아함을 가질 법 하다.
과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냥 애매모호하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툭 던져놓았을 뿐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나의 상징을 단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영화라든지 소설 혹은 시와 같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상징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단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약 지금 당신이 집안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면 현관문은 “출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면? 같은 현관문이라 할지라도 “입구”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관문의 역할은 관계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밖에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입구, 안에 있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출구가 된다.
(같은 칼이라 해도 엄마가 잡으면 요리도구, 도둑이 잡으면 살인도구가 될 수 있듯이.)

 




마지막 장면의 토템도 마찬가지다.

토템은 코브에게 있어 꿈과 현실을 판정하는 도구가 된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에서 코브는 꿈에서 깨어난 상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유일한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그것으로 이미 이야기는 완결성을 갖게 되었다. 해피엔딩, 끝!

연극이라면 이미 주인공이 무대를 떠난 상태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작 쓰러졌어야 할 토템이 쓰러질듯 말듯 비틀거리며 화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만약 토템을 코브의 것으로만 본다면 계산이 복잡해진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 장면 한 장면을 분석하듯이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토템은 코브의 것이 아닌 관람객인 바로 당신의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인공인 코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미 무대를 떠났다.
모든 배우들이 다 떠난 텅 빈 무대, 이제 남은 것은 객석의 관람객들 뿐 아니겠는가.


“그래, 코브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럼 당신은?”


문득, 감독이 당신에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꿈과 현실 vs 영화와 현실


코브에게 토템이 꿈과 현실을 판정하는 도구라면
당신에게 토템은 영화와 현실을 판정하는 도구가 된다.

생각해보라.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감독이 만들어놓은 영화라는 달콤쌉싸름한 꿈을 공유한다. 주인공이 긴장을 하면 함께 긴장을 하고, 주인공이 행복해하면 마치 자신의 기쁨이라도 되는 것인 양 함께 행복해한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인 코브가 현실로 되돌아왔다고 해서 관객들까지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다. 적어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관람객들이 막 현실로 복귀하려는 찰나 - 영화가 막 끝나려는 순간 - 을 쓰러지기 직전의 토템이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봤다면 토템이 이제 막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에서





인셉션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과감히 깨뜨려버린 영화다.

본래 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이 굳게 닫힌 비밀의 영역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그 문을 활짝 열어 젖혀버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 문을 통해 다른 사람의 꿈과 현실을 마음껏 드나들며 무의식을 추출해내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주입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했다. 굳게 닫혀 있던 스크린의 문을 열고 관객에게 대뜸 손을 내민 것이다. 관객들은 홀연히 뭔가를 인식하긴 했으나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조차 알아채기 힘들다.

당연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생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마지막 장면이 가슴 속에 묵직하게 남아있고 자신도 모르게 그 장면을 반복해서 되짚어보고 있다면 이미 당신의 무의식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심어놓은 생각의 씨앗으로 인셉션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씨앗으로 어떤 꽃을 피우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오마이뉴스에도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27054&PAGE_CD=21 


추가. weekly 오마이뉴스(종이신문) 영화란에도 기사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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